프랑스 샹송 ‘고엽’ 과 이브 몽탕에 대해…

발매된지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널리 애창되고 있는 이브 몽탕의 ‘고엽(les feuilles mortes)’ 입니다.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 (L’hymne d’amour)’ 와 더불어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죠. 제목에서 느껴지듯 요즘처럼 스산하고 쓸쓸한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프랑스의 현대 시인인 Jacque Prevert 의 원작시에 곡을 붙여 만든 이 노래는 1945년 ‘밤의 문 (Les ports de la nuit)’ 이란 영화에 삽입된 것으로 당시까지 무명이었던 이브 몽탕이 이 노래를 취입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죠. 이브 몽탕이 유명하게 된데에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여가수였던 에디트 피아프의 공이 큽니다. 남성편력이 강했던 ‘고독한’ 여인이었던 에디트 피아프는 노래와 연기 실력이 뛰어난 젊은 이브 몽탕에 반해 그를 후원하게 되고 전 애인이었던 권투선수 마르땅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몇 년간 이브 몽탕과 동거하게 되죠. 마치 한국 가수 나훈아가 배우 김지미와 함께 살며 그녀의 후광으로 크게 성장한 것처럼 이브 몽탕도 에디트 피아프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최고의 샹송 가수이자 연기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브 몽탕에 대해선 아래 자세히 적어 놓았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보통 불문학과 1학년 때 배우는 가사가 쉬운 노래인데, 오랫동안 불어 번역을 안 하다 하려니 머리가 굳어 힘드네요.^^


Les Feuilles Mortes

Oh ! Je voudrais tant que tu te souviennes
Des jours heureux où nous étions amis.
En ce temps-là la vie était plus belle,
Et le soleil plus brûlant qu'aujourd'hui.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à la pelle.
Tu vois, je n'ai pas oublié...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à la pelle,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아, 우리가 연인이었던 행복한 나날들을
네가 기억해주기를, 나 얼마나 원하는가!
그 시절 인생은 가장 아름다웠고
태양도 오늘보다 더 불탔었다
고엽은 삽으로 거두어지네
당신도 알겠지만, 난 잊지 않았어
고엽은 삽으로 거두어지네
(우리의) 추억도 회한도 역시...

Et le vent du nord les emporte
Dans la nuit froide de l'oubli.
Tu vois, je n'ai pas oublié
La chanson que tu me chantais.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Toi, tu m'aimais et je t'aimais
Et nous vivions tous deux ensemble,
Toi qui m'aimais, moi qui t'aimais.

그리고 망각의 차가운 밤 속으로
북풍이 그것들 (추억과 회한들)을 휩쓸어 가버린다
난 잊지 않았어
네가 나에게 불러주던 노래를
그것은 우리를 닮은 노래지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지
그리고 우리는 함께 살았었다
나를 사랑한 너, 너를 사랑했던 나…

Mais la vie sépare ceux qui s'aiment,
Tout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Les pas des amants désunis.

그러나 인생은 아주 부드럽게, 아무 상처도 내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을 소리 없이 갈라 놓으며
바다는 모래사장 위에 (새겨진)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우는구나

<이 부분은 원작 시중 가사에 포함 안된 부분입니다>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à la pelle,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Mais mon amour silencieux et fidèle
Sourit toujours et remercie la vie.
Je t'aimais tant, tu étais si jolie.
Comment veux-tu que je t'oublie?
En ce temps-là, la vie était plus belle
Et le soleil plus brûlant qu'aujourd'hui.
Tu étais ma plus douce amie
Mais je n'ai que faire des regrets
Et la chanson que tu chantais,
Toujours, toujours je l'entendrai !

고엽은 삽으로 거두어지네
추억도 회한도 역시...
그러나, 조용하고 변함없는 내 사랑은
아직도 미소지으며 삶에 감사하누나
너를 무척이나 사랑했으며, 너는 그토록 아름다웠는데
내 어찌 너를 잊을 수 있으리
그 시절 삶은 오늘보다 더 아름다웠고
태양도 더 불탔었다
너는 내 가장 다정한 연인이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오직 너를 그리워만 하고
네가 부르던 노래만이 존재하네.
영원히, 영원히 나는 그 노래를 들으리라







































Les Feuilles Morte(고엽) 을 모두 7명이 리메이크를 했다.. 듣기

원곡


[Ives Montand] - Les feuilles mortes



1


[edith piaf] - les feuilles mortes



2


[mireille mathieu] - les feuilles mortes



3


[juliette greco] - Les Feuilles Mortes



4


[francoise hardy] - les feuilles mortes



5


[demis roussos] - Les feuilles mortes



6


[rosenberg trio] - les feuilles mortes



7


[dalida] - les feuilles mortes




이브 몽탕은 1921년 10월 13일, 이탈리아의 밀라노 근교 몽스마노에서 유태인 빈농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보 리비(Ivo Livi). 그가 늘 남다르기를 원했던 어머니는 이브 몽탕(Montand은 up의 뜻이다)이라고 불렀고, 결국 이 이름은 그의 예명이 되었다.
몽탕의 가족은 몽탕이 태어난 지 불과 2년 후에 프랑스로 이주해야만 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활개를 치던 시대여서, 유태인이었던 그의 가족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르세이유의 뒷골목에 터전을 마련했으며, 이후 가난하게 살게 된 몽탕은 혹독한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삼류 극장을 드나들며 여러 가요 대회에 참가하는 등 연예인으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노래에 대한 재능을 차츰 인정받아 1939년 마르세이유의 이르가자르에서 데뷔하게 된다.
이브 몽탕은 우리 나라에서는 배우로서 더 이름이 높다. 몽탕은 1991년 11월 9일, 프랑스 북부 상 리스에서 장 자크 베넥스 감독의 영화「IP 5」를 찍던 중 갑작스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1992년 5월 파리에서의 대규모 콘서트까지 예정되어 있던 터였다. 소방차로 실려 가는 도중에 몽탕은 같이 타고 있던 소방관에게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을 만큼 충분히 살고 그 삶을 겪었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전체는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그가 살던 아파트에는 조화를 든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모든 프랑스 방송이 며칠 동안 거의 그의 일대기를 방송했으며 미테랑 당시 대통령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고엽’이 실린 두 장의 앨범에는 이브 몽탕의 청년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1945년에서 1949년 사이에 녹음된 몽탕의 노래들은 그의 감수성과 여운을 진하게 들려주고 있으며, 배우이기 이전에 가수로서 인정받은 시기의 증거들이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노래 외에 당시 유명한 가수들과의 듀엣도 담고 있으며, 서정미 넘치는 선율을 프랑스의 에스프리를 잘 살린 리듬 반주로 돋보이게 하고 있다. 특히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고엽>이 여러 버전으로 들어 있어,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이 앨범은 몽탕이 프랑스에서 남긴 모든 녹음이 들어 있는 디스코그래피다.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때인 만큼 노래를 부르는 몽탕의 목소리 자체는 이미 그가 노래를 자신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오데온사에 남긴 것 외에 영화에 삽입되었던 곡을 포함, 작곡,작사자 이름과 참가 연주인과 연주 단체의 이름이 오데온사 고유 발매 번호와 함께 친절히 수록되어 있는 그야말로 몽탕의 프랑스판 디스코그래피다.


- 양심적, 합리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이브 몽탕

1991년 11월 9일 프랑스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은 모든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국민가수이자 국민배우인 이브 몽탕 (Yves Montand 1921∼1991) 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샹송 '고엽 (Les Feuilles Mortes)' 을 비롯해 그의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울려퍼졌고 텔레비전에서는 그가 출연한 영화가 방영됐다.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해 "그와 함께 우리시대의 위대한 목소리와 배우로서의 뛰어난 재능이 사라졌다"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샤를 드골 사망 이후 프랑스는 나라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이브 몽탕은 이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지만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좌파 정치활동을 벌여 온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 (PCF) 의 당원이자, 정치영화의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정치활동과 예술을 결합시킨 프랑스 최고의 좌파 예술가였다.
이브 몽탕이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리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오반니 리비는 이탈리아 농노 출신으로 1921년 당시 급부상하던 사회당의 급진적 다수파가 결성한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해 10월 그의 셋째 아이 이브 몽탕이 이보 리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들불처럼 번지던 이탈리아였지만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앞세운 파시스트당이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922년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과 ‘검은셔츠단’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무솔리니는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는데 지오반니 리비는 1924년 파시스트당에 소환돼 "협력을 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로 피신했다. 그는 원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이민이 불가능해지자 마르세이유에 정착해 1929년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11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빵공장에 다녀야 했던 이보는 15살때부터 누이인 리디아의 미용사 일을 도우며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 프랑스로 건너와서도 공산당 활동에 열성이던 아버지와 공산당에서 전업활동가로 일하던 형 길리아노의 영향으로 인해 이보는 약자의 편에 서있는 좌파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점점 굳혀갔다.
제철소에 노동을 하던 1938년 17살의 이보는 우연히 마르세이유의 한 밤무대에서 공연 전 분위기를 잡는 가수 역할을 하면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예명을 이브 몽탕으로 지었다. '몽탕'은 그가 어렸을 때 밖에서 뛰어놀면 집안에 있던 어머니가 창문가에서 그를 "이보! 올라와 (monta)"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브 몽탕은 점차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변두리 극장이긴 했지만 자신만의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2차대전으로 인해 그는 나치의 강제노역에 동원돼야만 했다.
1944년 2월 수용소를 탈출해 파리로 간 이브 몽탕은 파리에서 가수로서 명성을 날리게 됐고 전설적인 샹송가수 에디뜨 피아프와 만나게 됐다. 에디뜨 피아프의 도움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브 몽탕은 영화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헐리우드가 그에게 주목하기도 했지만 당시 매카시즘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미국은 그의 가족의 공산주의 전력을 들어 입국을 불허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가수이자 배우인 몽탕의 인기는 더욱 커져갔다. 1951년 그는 당시 인기 여배우인 시몬느 시뇨레와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다.
그가 공산당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쯤이었다. 그는 1950년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으로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공산당 당원이 된 것이다. 그의 아내 시몬느 시뇨레 역시 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해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몽탕은 가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집회에 참가해 연설을 하면서 정치적인 활동을 벌였고 1956년에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이 있었던 이 때 몽탕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매카시즘의 열풍이 잦아들었던 1960년 그는 아내인 시몬느가 상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는 동안 마릴린 먼로와 '사랑합시다 (Let's Make Love)' 라는 영화를 찍었다. 영화보다는 그와 마를린 몬로와의 염문이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1960년대 그는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동참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68년 소련군이 탱크를 밀고 체코를 침공한 것에 반발해 그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좌파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 출신의 정치영화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와 <계엄령>에 출연해 군사독재와 미국의 제3세계 정치개입을 비판하는 한편 피노체트 독재시절 칠레의 민주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산티아고를 방문해 샹송을 부르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지 14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샹송가수나 명배우의 경지를 뛰어넘어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거인으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1980년대 프랑스인들은 이브 몽탕을 대통령 후보로 거론하기도 했으나 그는 죽는 날까지 영화에만 전념했다. 1991년 11월 8일 장 자끄 베네스 감독의 영화를 찍고 있던 그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다음날 파리교외의 상리병원에서 70세의 인생을 마치고 에디뜨 피아프와 시몬느 시뇨레가 묻혀있는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 라 셰즈에 안장됐다.
한국 언론에서는 그가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가장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말년에 자서전 <나는 잊지 않았다>에서 자신이 일평생 동안 좌파의 길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비디오로 접할 수 있는 이브 몽탕의 출연작

마농의 샘 (Manon des Sources) 1986
계엄령 (Etat De Siege) 1973
세자르와 로잘리 (Cesar et Rosalie) 1972
암흑가의 세 사람 (Le Cercle Rouge) 1970
제트 (Z) 1969
나폴레옹 (Napoleon) 1954
공포의 보수 (Le Salaire De La Peur) 1953
마릴린 먼로의 사랑합시다 (Let's Make Love) 1951




이그레이스: 준수님 정말..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샹송CD가 한장 있어 요새 들어야겠다며 이 곡을 생각했는데.. 제가 좋아하는 에딧뜨 삐아프까지 있어 더욱 좋으네요.. 가을이 가기전..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날까요? -[10/18-15:43]-


이준수: 덕수궁 돌담길은 예전 6,70년대에나 연인들이 데이트했던 곳이고 요즘은 더 멋진 곳도 많지 않을까요? 또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그 커플은 항상 깨진다는 징크스도 있죠 하하... 아뭏든 저희도 그레이스 집사님 무척 뵙고 싶습니다. 정기 모임에 상관없이 언제 시간 약속하고 한번 뵙도록 하죠^^ -[10/18-20:29]-


이그레이스: 그래요 만나고 시포요..다른 도시로 가신다구요 흑흑흑... -[10/31-0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