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고 자주적인 한일 관계를 위하여

<지난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바라보며 쓴 글로서 현재 논란 중인 독도 문제를 비롯해 전반반적인 한일 관계에 대한 제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 와서, 이제는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충분한 사과도 받고 했으니, 더 이상 지난 날의 원한에 얽매이지 말고 21세기 태평양 시대의 동반자로서의 새로운 한,일 관계를 정립해 나가자고 말하였다. 아울러 일본 대중 문화도 두려움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일 두 나라가 양국간의 불행했던 과거로 인한 서로에 대한 반목과 갈등을 지양하고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아시아의 발전과 세계 평화를 위해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루어 나가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건전한 문화 교류를 통해 양국 국민이 상호간에 이해와 친선의 폭을 넓힌다면 이 역시 매우 유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양국간의 이러한 발전되고 긍정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역시, 지난 날 식민지 침략국으로서의 일본의 올바른 과거 인식과 철저한 참회와 반성, 그리고 한국민에 대한 겸손하고 진실된 사죄일 것이다. 사실 한,일 양국 지도자들이 서로 상대국을 방문할 때 마다 일본측의 이러한 '사과와 반성'은 늘 있어 왔다. 그들은 '통념', 통석'이란 표현을 써가며 과거 양국의 불행한 관계에 대한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는 말을 항상 해오곤 했다. 그러나 그 '사의'의 표현은 전혀 진실성이 결여된 말장난에 불과했으며 얼마 안 있어 다시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조선에게 유익했다' 라고 하는 망언의 주둥아리를 놀려대어 한국민들의 분노와 규탄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일본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왜곡, 호도시키고 독도에 대한 억지 주장을 일삼으며 공해상에서 정상적인 어업활동을 하는 우리 어선을 불법 나포하는 등 한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킬만한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모습이 전혀 다른 비열하기 짝이 없는 족속이다.

이러한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사람들이 겉으로만 나불대는 간사한 말을 듣고 와서 이젠 모든 것을 잊고 사이 좋게 지내자고 혼자 만족해하며 히히덕거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련하고 한심한 지도자들... 이런 아둔한 사람들을 지도자로 둔 불쌍한 우리 국민에게, 역사에도 기록돼 있지 않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한,일 관계의 치욕적인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10년 일본의 강제적인 조선 병탄 후에 그들이 서둘러 행하던 일 중의 하나는 조선의 임금을 일본 임금 앞에 무릎 꿇려 군신 관계를 선포하는 굴복의 예였다. 조선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 대신 윤덕영은 순종을 갖은 협박 끝에 동경으로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 일왕의 궁전에서 굴복의 예를 취할 때 순종은 일본 육군대장 복장이요 일본 임금은 육군 대원수 복장으로 신분의 차등을 두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 임금이 일본 임금에게 고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성상폐하, 척(순종 이름) 동상하야 천안을 지척하와 친히 천기를 봉사하여 적년의 회포를 풀 수 있음은 충심흔영으로 여기는 바이오며 세자 은(영친왕 이름)은 오랫동안 궐하에 있어 항상 폐하의 학덕을 쫓으니 감명을 금할 수 없으며 이번 척 동상에 즈음하야 폐하의 극진한 대우에 공구 감격 몸둘 바를 몰라 감사드리옵나이다.'.
물론 일본 사람이 지은 것을 읽도록 강요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 왕조 500년 종묘 사직을 고스란히 내어 준 것도 모자라, 순종 임금이 일왕의 거처인 궁성의 풍명전에서 일본 왕이 주최하고 조선 침략의 원흉들인 데라우치, 하세가와, 미우라 등이 배석한 만찬에 참석하여 일본 왕비, 왕세자 그리고 귀족들에게 일일이 굴복의 예를 강요 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임금을 협박하여 모욕적인 굴복의 예를 강요한 일본이라면, 그들이 과거사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한다면 그 나라 우두머리 중 누군가가 우리나라에 와서 무릎꿇고 사죄해야 마땅하다. 사죄하는 사람이 자기 집에 앉아서 사죄 받을 사람을 불러다가 그것도 옹색한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죄란 있을 수 없다.> (조선일보 '이규태 컬럼'에서 인용, 문맥에 맞게 수정)

이렇듯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명백하고 가해자 측의 철저한 사과를 받아내야 함이 당연한데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일왕을 '천황폐하' 라고 깎듯이 존칭하고 일본의 군국주의적 성향의 정치인, 관료, 자본가들이 참석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본어로 대화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기가찰 노릇이다. 식민지 조선의 황국신민화 교육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구나 하는 허황된 망상을 일본의 늙은 제국주의자들에게 확인시켜준 결과만 가져왔을 뿐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수립된 민주, 국민 정부의 지도자라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했어야 될 일은 천황폐하 운운하거나 그들의 마음에도 없는 거짓 사과를 받고 혼자 좋아하는 일이 결코 아닌, 양국 사이에 쌓여 있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안 문제들을 확실하게 담판 짓는 것이어야 했다. 현재 한,일 양국간에 가장 민감하고 해결이 시급한 문제는 역시 독도 영유권 분쟁과 종군위안부 문제일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방일 바로 전에 체결된 '한일 신어업협정'은 일본측의 요구가 그대로 관철된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이 협약에 따르면 한국은 연간 5000억원의 어업상의 손실을 보고 특히 독도 영유권 조항을 모호하게 해 놓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억지 주장을 반복할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놓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외교 정책에 커다란 실책인 것이다.

1982년 영국은 본토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남대서양의 작은 바위섬인 포클랜드섬을 지켜내기 위해 아르젠티나와 전쟁까지 벌였다. 아르젠티나의 부패한 군사 정권이 국민들의 불만을 호도하기 위해 이 섬을 불법 점령하자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은 항공모함까지 동원하여 아르젠티나와 싸워 이겨 포클랜드섬을 탈환하였다. 사실 포클랜드섬은 영국령이긴 하지만 지리적으로 아르젠티나에 훨씬 가깝고, 영국 국민 대다수가 그 섬의 존재조차 몰랐던 지극히 쓸모 없는 섬이었다. 그런데도 영국 정부는 국제법상 자국의 영토라는 명분 하나로 과감한 군사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에 비해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명백한 우리의 영토임이 틀림없고 포클랜드섬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군사적, 경제적 중요 지역이며, 특히 '독도는 우리 땅' 이라는 전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정도로 대한민국의 소중한 영토이거늘 어찌 저 간악한 쪽바리 제국주의자들이 '다케시마' 운운하며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것을 그대로 놔 둘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지난 1965년 단 돈 3억 달러에 굴욕적인 한일 협정을 체결하여 민족의 정기와 자존심을 팔아 버리고 독도를 폭파하자고 주장하던 민족 반역자가 현정권의 국무총리로 위세를 부리는 이 나라를 어찌 자주 독립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종군위안부 문제도 그렇다. 일본 정부는 보상금 몇 푼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 나라의 정신대 여성들의 치욕적인 한과 아픔을 무마하려고 하는데 절대 어림 없는 소리이다. 이러한 일본의 파렴치한 수작을 엄중 항의하고 자국의 피해자들의 권익을 요구, 대변해야 할 한국 정부가 오히려 그들의 얄팍한 설득에 놀아나고 있으니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거 조선의 처녀 사냥에 관여했던 일본의 군국주의 관료와 식민지 앞잡이들 중 생존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남한과 북한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몇 해 전 이스라엘과 독일 정부의 협의하에 과거 나치스 유대인 학살자들을 예루살렘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한 예가 있듯이 남,북한, 일본 정부가 상호 동의한다면 국제법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자 노력한 권중희씨의 말대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는 공소 시효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나서 순종 임금이 메이지 일왕에게 했던 그대로 일본의 아키히토 국왕이나 수상이 우리의 정신대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서울과 평양 정권이 진정 한민족의 정기를 살리고 자존심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서로 협력하여 일본 정부에 이 점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천황 호칭에 대해 잠간 언급하겠다. 한국 정부는 국제 관례에 따라 천황 호칭을 공식화 하겠다고 발표하였고 매스컴에서도 이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 국민 정서와 절대 부합될 수 없는 반민족적 행위이다. 천황이란 단어는 '야스쿠니'와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와 일맥 상통하며 일본 우익 세력은 여전히 천황을 신처럼 여기며 '대일본제국'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더구나 우리 역사에서 '천황'은 뼈에 사무친 원한의 단어이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는 적의 심장인 동경 한복판에서 아키히토 현 일왕의 아버지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려다 실패하여 즉시 총살 당하였고 그 해 4월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생일 축하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중국 침략의 원흉들을 응징하고 역시 총살을 당하였다. 또한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천황과 그 조상들에 대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를 당하였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서 관례로서 사용한다고 우리 역시 천황폐하 운운한다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죽음으로서 항거했던 우리의 수 많은 애국 지사들에게 크나큰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한지 50년이 넘었건만 우리는 아직도 일본에게 당당하지 못하며 그들로부터 변변한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해방 직후 우리가 민족 반역자들을 제대로 처단하지 못한데 있으며 그 후 정통성이 결여된 군사정권이 자신의 부도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굽신거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욕의 역사를 딛고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정부라는 김대중 정권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대일 외교 정책을 펼쳐 나가야 한다. 물론 일본과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그들의 문화를 폭 넓게 수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일본에게 과거사 문제를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해결하도록 당당하고 구속력 있게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 한,일 양국의 올바른 역사 인식의 공유야말로 상호간의 오랜 질시와 반목을 청산하고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있는 초석이기 때문이다.

1998. 10.

이 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