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장애인
(마15;29-31)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1, 오늘 본문에 보면 장애인에 대한 호칭이 많다.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그리고 또 어떤 곳에는 난쟁이, 곱사등이, 문둥병자... 이런 표현들도 있다. 이런 호칭은 장애인들에 대한 좋은 호칭이 아니다.
KNCC 장애인선교위원회에서는 지난 90년대 초 대한성서공회에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어 앞으로 성서를 번역할 때 장애인 호칭에 대하여 고려해 줄 것을 요청한바 있으며 1999년에 대한 성서공회에서 펴낸 “개역 개정판” 성경에 보면 절뚝발이를 다리 저는 사람으로, 불구자는 장애인으로, 소경은 맹인으로, 벙어리는 말 못하는 사람으로 번역했다. 우리도 우선 장애인에 대한 용어를 잘 골라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예전에는 장애인 흉내를 내면서 유흥을 즐기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다리 저는 흉내, 눈 가리고 양재기 치며 따라 오라는 놀이, 등허리에 바가지를 넣고 춤을 추는 것... 이런 놀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해서는 안 된다.

2,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

여러분, 우리 한국의 장애인 총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가? 정부 발표로는 105만 - 전 국민의 2.23%이다. 그렇지만 장애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숫자가 많이 달라진다. 통상 선진국에서는 보통 장애인 수를 10% 내외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의 장애인 수를 대략 한 40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경에 보면 장애인들이 많이 나온다. 요9;에 보면 나면서부터 앞 못보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말 불행한 일이다. 그런가하면 중도에 시력을 잃은 사람도 있다. 특히 팔레스틴은 먼지가 많고 햇볕이 따갑기 때문에 당시에는 의술도 발달되지 않았고 - 중도에 시력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시력이 감퇴된다. 삼상3;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웠다는 말씀이 있고, 왕상14;4에 보면 선지자 아히야가 역시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웠다고 했다. 그리고 창27;에 보면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가지고 큰아들을 축복한다는 것이 작은아들을 축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시각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이 많다. 그렇지만 시각장애뿐 아니라 모든 장애가 다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약물 중독이나 공해 때문에 나면서 장애를 입고 태어나는 이도 있다. 대한 산부인과 학회 통계에 의하면 매년 2만여 명이 기형아로 출생하고 있다. 어떤 이는 질병 때문에, 어떤 이는 산업현장에서 실수로 장애를 입기도 한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각종 질병 및 의로 사고로 매년 2만7천여 명이 장애를 입고, 노동부 통계에 의하면 매년 3만여 명이 장애를 입고 있다.
그런가하면 고령으로 골다공증이 생기고, 관절 때문에 지체장애가 있어 층층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어렵다. 디스크로 척추장애가 있으신 분,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잘 안보이시는 분, 혈압으로 전신장애가 되신 분... 장애인이 정말 많다. 또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해마다 3만7천여 명이 장애를 입고 있다. 정말 이 복잡한 도시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언제 어떤 모양으로 장애를 입을지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처럼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이들을 가리켜 “예비 장애인”이라는 말을 쓴다. 언제 장애를 입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의 문제는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니라 곧 나의 문제 -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

3, 장애인도 불편 없이 살수 있는 사회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가 어떤가? 모든 시설과 제도가 다 비장애인 - 아무런 장애가 없는 우리들 위주로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 NCC 장애인선교위원회는 우리가 직접 장애 체험을 해 보자는 뜻으로 여러 차례 “사랑의 장애인 체험대회”를 가져 본 일이 있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종로 5가 기독교 회관까지 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기독교 회관까지 휠체어를 타고 이동을 해 보았다. 그래도 종로나 대학로는 시설이 비교적 잘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길거리 둔덕 때문에 휠체어 이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어떤 분이 장애인에게 맛있는 음식을 한번 대접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좋은 음식점으로 휠체어를 타고 갔는데 입구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이 그를 업고 들어가서 음식 대접을 했다. 음식 대접을 잘 받고 이 분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이렇게 좋은 음식은 처음 먹어본다”면서.
그러나 “이렇게 업혀 들어와서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내 휠체어로 그냥 들어와서 싼 음식 먹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음식을 먹기 위해 내 몸을 남에게 업히면 내 마음이 불편하고 무겁다”는 것이다.
장애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장애를 입었다는 것 때문에 남에게 무시를 당하고 그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게 해서는 안되겠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들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오고 싶어도 들어 올 수가 없다. 대부분 층층 계단이지... 경사로를 설치한 교회가 많지를 않다.
“여기는 비장애인 교회이니 장애인들은 오지 마시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래서 장애인들이 교회를 오고 싶어도 못 온다. 또 장애인들이 혹 교회를 와도 귀찮아한다. 자기들끼리만 어울리지 장애인은 거들떠보지를 않는다. 오히려 장애인 때문에 비장애인이 안 올까 걱정을 한다. 이런 것이 문제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이 교회를 와도 편안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 또 봉천동 서울대학이 장애인 학생이 하나 입학하게 됨으로 그 학생이 불편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수 천 만원을 들여 시설을 개조했다는 방송을 듣고 그 학교들이 참 좋은 학교라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 아니겠는가? 울안에 있는 99마리도 귀하지만 잃은 한 마리 그것을 찾기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하고라도 찾아 나서는 마음이 목자의 마음이다. 롬15;1에 보면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담당하고, 많이 배운 사람은 적게 배운 사람을 담당하고, 많이 가진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을 담당하면서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전에는 장애인이 귀찮으니까 너희는 너희들끼리 공부하고 너희들끼리 예배하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가끔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러가듯 먹을 것이나 장난감 같은 것을 가지고 방문이나 하면 우리가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생활태도가 중요하다.

교회가 장애인들을 위해 아무리 편의시설을 잘 갖추었다 해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환경조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실 다 소용없다는 것이다. 오늘 장애인에 대한 실정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장애인들은 지금 불이익 당하는 일이 사실 너무나 많다. 그들은 교육의 기회도 거의 없고, 직업 갖기도 어렵다. 그리고 소득수준도 아주 형편없이 낮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대개 절대 빈곤계층에 속한다.
그들은 재활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전문의도 턱없이 모자라고,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전국에 30개도 안 된다. 그것도 대부분 대도시에 몰려있다. 그러니 한 번 이동하려면 사람이 따라 붙어야 되는데 비용이 너무 나 많이 든다. 그러므로 장애인들은 대개 집이나 장애인 시설에 수용되어 근근이 생명이나 이어가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교회는 그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동권을 확보해주고,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접근권을 찾아주고, 교육권, 치료권, 생존권, 그리고 사람으로서 사람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인권을 찾아주는 일을 위해 앞장서야 되는 것이다.

4. 예수님은 장애인들의 친구이십니다.

막10;에 보면 시각 장애자이며 거리에서 구걸하며 살던 바디매오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길가에서 구걸하다가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다. 이 외침을 제자들은 소음으로 들었다. 시끄럽게 들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장애인에게 “잠잠하라”고 나무란다. 그러나 이 사람은 더 크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다. 그 때,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눈을 열어 보게 하셨고 그는 즉시 예수를 좇았다고 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장애인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한번도 그대로 지나치신 일이 없다. 마8;에 보면, 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내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도움을 요청할 때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즉시 응답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막2;에는 네 사람의 친구가 한 중풍병자를 상에 들고 와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심으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또 막7;에는 귀먹고 어눌한 자가 찾아와 안수를 원할 때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아 그 혀에 손을 대시며 “에바다” 하시므로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 졌다는 말씀도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바삐 길을 가시다가도 장애인이 찾아와 도움을 원할 때는 언제나 애정어린 손길을 펴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다. 냉정한 귀를 가진 제자들은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자비한 귀를 가지신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런데 우리들 교회와 이 사회는 냉정한 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장애를 입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는다. 제자들처럼 소음으로 여기고, 무시하고, 귀찮아한다. 우리는 이런 잘못들을 회개하고 우리들 교회로부터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귀담아 듣고 적극 응해야 하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장애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사람 된 것을 감사하며, 장애인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한 나눔을 새롭게 다짐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