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올림픽 종합성적 톱10에 진입한다든지, 월드컵 4강에 오른다든지, 한국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각광을 받고, LPGA를 석권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과거 한때, 우리 국민들은 복싱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세계 챔피온인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은 한국인들이 우물안 개구리 수준에서 벗어나 범세계적인 가치기준에 적응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2002년 6월 한 달은 반만년 역사 이래 우리 한민족에게 주어진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온 겨레가 하나 되어 온통 축제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서울시청 앞을 비롯, 전국의 붉은악마 길거리 응원단이 천만 명에 육박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그때의 감격을 회상할 때마다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우리나라가 아시아 최초로 일본과 월드컵을 공동개최한 것만도 기념비적인 사건인데, 게다가 4강 신화를 이룸으로서 대한민국의 긍지와 자부심을 한껏 드높였으니 그 벅찬 감격을 어떤 말로도 형용키 어려울 정도다.
우연히도 나는 월드컵 대회가 열릴 때면 꼭 한국에 와 있는다. 지난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제외하고 두 차례의 월드컵 경기를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시청하며 그 뜨거운 응원의 열기를 생생하게 느낄수 있었다. 이번 여름에도 '중요한 일' (?)이 있어 서울에 나와있던 차에 독일 월드컵 경기도 함께 볼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선 축구가 별로 인기가 없어 공증파 방송에서 중계를 잘 안 해 돈을 따로 지불하고 ESPN 같은 케이블 방송을 통해 시청해야 한다.
지난 2002년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한 달 동안, 거족적 축제를 흠뻑 만끽한 우리 국민들이 이번 독일 월드컵에 거는 기대는 참으로 각별하다. ‘아드보카드’ 감독의 분위기가 ‘히딩크’와 매우 흡사하여 국민들에게 신뢰감과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현 대표팀의 전력이 2002년 보다 훨씬 더 보완되고 향상되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나오자 우리 국민들은 이번에도 4강 신화를 재연하자는 기대와 열망에 잔뜩 부풀어 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기대가 너무 크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그만큼 커지는 법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뻥튀기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우리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는 데 있다. 그렇다고 김을 빼자는 의미는 결코 아니며, 국민들의 환호와 열광에 찬물을 확 끼얹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얘기다. 스포츠를 가장 천박하게 만드는 요인은 승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물론 이기면 좋겠지만 지더라도 흔쾌히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어쩔 수 없는 실력차로 졌을 때는 상대팀의 훌륭한 플레이를 본받고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난 일요일, 본선을 앞둔 마지막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한국 대표팀은 완패했다. 스코어는 3-1 이었지만 내가 판단할 때, 5-1 정도로 크게 벌어진 경기였다. ‘아드보카드’ 감독의 표현대로 ‘유럽 리그와 K리그의 수준차’가 확연히 드러난 경기였다. 차범근 해설위원은 우리 선수들의 몸이 무거워보인다고 에둘러 변명했으나 가나 전에서의 완패는 현격한 실력차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마치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당시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에 5-0으로 패했을 때와 매우 흡사한 경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우리 선수들은 90분 내내 패스 미스를 연발하여 보는 이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선수들이 못해서라기 보다는 가나 선수들이 그만큼 공간활용에 뛰어난 압박수비를 펼쳤기 때문이다. 가나는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공수연결이 빠르고 매끄러웠다. 한국팀을 상대로 그렇게 일방적인 경기를 펼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우리가 졌다고 해서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라 가나의 전력은 브라질, 프랑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세계 최정상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그러나 누렇다고 다 금이 아니듯 검다고 다 ‘가나’처럼 뛰어난 전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내가 볼 때 우리의 첫 상대 ‘토고'는 ‘세네갈’ 정도의 실력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우리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월드컵 16강에 오르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는 첫 경기인 토고 전에서의 승리인데 우리 대표팀은 토고를 이길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갖췄다고 본다. 문제는 선수들이 꼭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에 몸이 경직되어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점이다. 나는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면서 그 점을 통감했다.
박지성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너무 크다보니 박지성은 공을 잡으면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정신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고 자연히 볼 컨트롤이 어색해 졌다. 특유의 돌파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드리블이 엉성해지다보니 상대 수비수에게 공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선수들이 스타의식을 버리고 경기 자체에 몰입해야 몸이 풀리고 가벼워진다. 뭔가 멋진 걸 보여주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경기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90분을 유장하게 이끄는 침착함과 노련미가 필요하다.
현대 축구는 허리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원 장악력에 의하여 승패가 좌우된다. 우리 대표팀의 허리를 맡고 있는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 이을룡, 송종국은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들로서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다. 이들이 제 컨디션만 잘 발휘해도 팀 플레이는 매우 활발해질 것이며 토고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 나아가 프랑스, 스위스를 꺾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손발이 맞지 않고 각자 개인 플레이를 벌이게 되면 토고 전에서조차 승산이 희박해진다.
최근 일본의 축구 영웅 ‘나카타’는 FIFA 랭킹 125위의 약체인 ‘몰타’와의 평가전에서 1-0 으로 겨우 신승한 뒤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일본은 쓰레기 팀이다!” 라고 내뱉었다. 일본 대표팀에 ‘뜨거운 가슴으로 뛰는 선수’ 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나카타의 경기 매너와 쿨한 성격을 좋아하는 편인데 지나치게 극단적인 표현이긴 했지만 나는 왠지 자국 대표팀을 향한 그의 쓴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나카타의 쓴소리는 그가 그만큼 일본 대표팀에 큰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 중에서도 가나와의 평가전을 치른 뒤 “한국은 쓰레기 팀이다!” 하고 나카타와 같은 쓴소리를 하는 선수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카타가 표현한 ‘뜨거운 가슴으로 뛰는 선수’는 어떤 선수일까? 팀플레이에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선수가 아닐까?
멋진 플레이는 바로 그런 정신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지금은 16강 진출이 당면 목표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11명의 선수 전원이 바로 ‘뜨거운 가슴’으로 뛰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설령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국민들의 "대~한민국!" 함성은 더 드높아 질 것이다. 한국 대표팀 유니폼에 새겨진대로 우리 선수들이 매 경기마다 정열적인 '투혼'을 발휘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근 한달동안 '서울의 잠 못드는 밤들'이 될 것 같다.
2006. 6.
이준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