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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남편 선교사의 짝사랑과 머리카락과의 함수 관계
브라질 김혜란 선교사(김선웅 선교사 짝꿍)
선교 경력 15년 차인 남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결혼사진에 찍혔던 빼곡 했던 검은 머리가 문득 문득 생각이 난다. 비록 지금은 듬성듬성 그것도 검은 머리보다는 흰머리가 더 많아진 나이 겨우 44세의 나의 남편 선교사(1965년생). 남들이 말하기를 뒤에서 보면 완전 60대라나….
지난 번(2008년) 한국 방문 때의 일이다. 당시 남편 혼자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남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그렇잖아도 흰 머리 때문에 나이가 들어 보여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버스를 타게 되었다. 한국은 요즘 어르신들에게 무료 승차권을 드리는 바람에 어르신들이 대중 교통을 많이 이용하고 계신다. 그 날도 유난히 많은 어르신들이 버스에 탑승하고 계셨는데 남편은 앞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그런데 뒤 쪽에서 자리가 생겼나 보다. 뒤에 앉아 계시던 어떤 할머니께서 큰 소리로 “ 할아버지! 여기 자리 났어요.” 물론 남편은 할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척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안타까웠는지 더 큰 소리로 “ 저 할아버지 못 듣나 봐.”
잠시 후 어떤 중학교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또박 또박 걸어와서는 남편의 등을 똑 똑 두드리면서 “ 할아버지! 저기 앉으세요.” 당황한 남편은 “ 곧 내려요.” 그리고는 30분을 더 타고 가다가 내렸는데 30분 동안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 내리고 시선이 쏠리는 바람에 목 덜미가 화끈거려서 혼 났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며 하는 말이 자기가 선교를 무지무지 잘 해서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남들이 자기를 섬길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웃으면서 말은 했지만 왠지 그런 남편이 안쓰럽기만 하다.
그렇게도 많던 남편 머리카락이 이렇게까지 줄어든 이유는? 다름 아닌 짝사랑 때문이다. 상대방은 알아주지도 않는데 계속 혼자 사랑하고 마음 아파하고 고민하고 하다 보니 머리에 뚜껑이 열리고 열이 나서 머리카락이 남아 나지 못하고 거의 다 빠져 버렸다. 짝사랑이란 단어는 본인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사랑 받는 사람에게는 거의 느낌이 없다. 왜냐하면 그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짝사랑은 매우 서사적으로 묘사되어 아름답게 생각되지만 실제 현실에서의 짝사랑은 소설처럼 아름답거나 환상적이지 않다. 사랑의 대가로 눈물을 흘리고 여러 날 가슴 아파하며 다시는 안보리라 하면서도 다음 날 또 다시 보고 싶고… 정말 다시는 하고 싶지 않는 그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해야만 하는 고통의 시간들을 갖게 하는 그런 짝사랑…
그럼 남편의 이런 짝사랑 상대가 누구냐 하면….. 다름아닌 브라질 사람들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겉으로는 다 좋다고 하지만 뒤에서 총을 쏘기도 하고 받은 것에 대하여 고마워 하지도 않고 도리어 당신이 주고 싶어서 나에게 준 것인데 뭐가 고마우냐고 도리어 역성을 내기도 한다. 몇 년 동안 공을 들여 이제는 괜찮겠지 하면 어느새 처음으로 돌아가 버려서 지금까지 한 수고가 모두 무너져 내릴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도하고 참아주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때때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도 너를 이렇게 참아주며 사랑한단다” 라고 말씀하셔서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곤 한다.
어느 날인가 내가 브라질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더니 남편 하는 말이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에 온 거야” 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도록 속 썩이는 브라질 사람들의 무엇이 좋다고 저렇게 감싸는지 얄밉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남편의 지극 정성이 조금씩 상대방에게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의 짝사랑이 혼자만의 사랑이 아닌 쌍방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티걱 태걱 하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서로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적어도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1995년 12월 24일 첫번째 교회인 베이자 플로르 교회를 개척했다. 한국에서 목회 경험 없이(교육전도사 경험만 있음) 완전 생 짜 배기가 개척 교회를 하다 보니 좌충우돌하며 안 되는 포르투기스를 손짓 발짓과 함께 사용하면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흘린 눈물과 땀 방울은 측량하기가(?) 심히 불가능하다.(브라질이 일단은 더운 지방이고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여 마음먹은 대로 안되니 눈물과 땀이 날 수 밖에…. 흑흑). 요리사, 청소부, 미용사, 교사, 보모, 건축사, 침술사 등 안 해 본 것이 거의 없을 만큼 다양한 일들을 했다.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것들을 안 가르쳐 주었는데…… 그리고 만 10년 만에 훈련시킨 현지인들에게 지도력을 이양하고 2번째 교회를 개척했다.
그런데 2007년 12월 24일 날 교인들이 교회 창립 12주년 기념식을 하면서 우리를 감격시키는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지나온 12년의 순간 순간들의 사진들을 컴퓨터로 잘 조합하여 설명을 하고 맨 마지막에 우리 부부 사진을 띄우면서 이 모든 것이 이 두 명의 한국 선교사들의 수고 때문이라고 하면서 모두가 기립 박수를 치며 감사장을 주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감사장이 대단해서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저들이 드디어 알아주고 있구나,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가 아니었구나 하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
우리가 처음 사역을 시작한 곳은 한국으로 말하면 1970년대 강원도 산골짜기 같은 곳이었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골 농촌 지역이었는데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보니까 사람들이 찬양도 안 하고 성경도 안 읽는 것이었다. 처음이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매 주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 읽기는 읽어도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전혀 참여를 못하는 것이었다. 조사를 해 보니 제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4학년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년들은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마땅한 직업이 없었고 그래서 주로 산에서 농사를 짓거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꿈도 없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교통편이 없어서 외부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근처에 주립 학교가 있긴 하지만 이미 나이가 먹은 청년들인지라 나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검정고시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도시로 나가야 하는데 버스가 하루에 3번밖에 안 지나가기 때문에 저녁에 공부를 마친 후 도시로부터 이곳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없어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공부를 해야 성경을 가르치더라도 효과가 있을 텐데 학교를 다닐 수 없으니 대책이 없었다. 청년들은 이것이 운명이려니 하며 자포자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버스 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밤에 우리 동네로 버스 노선 하나를 개설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웬 외국 사람이 말도 잘 못하면서 부탁하는 것이 우습게 보였는지 코웃음 치며 단번에 거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시청 교통국으로 가서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청년들이 공부를 하고 싶은데 버스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고 있다고. 그리고 공부를 하지 못하면 직업을 가질 수 없고 시에다 세금도 낼 수 없다고. 또한 똑 같은 시민인데 왜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냐며 반 협박을 하다시피 사정을 하였다. 담당자는 우리의 열심에 감동을 하여 즉석에서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강제적으로 노선을 개설하라고 명령을 하였다. 버스회사에서는 화가 나서 한 달 간 시험 운행을 해 보고 승객이 없으면 다시 취소하겠다면서 나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하였고 드디어 시험 운행이 시작되었다. 15명의 교회 청년들이 공부를 마치고 밤 11시에 버스를 타면 이 버스는 다른 동네를 돌고 돌다가 새벽 1시에 우리 동네에 도착을 하였다. 집에 들어가 씻고 잠자리 들면 1시 30분 그 다음 날 다시 6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일하다가 오후 5시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공부를 한 다음 또다시 새벽 1시에 도착하고. 이러기를 1주일 하더니만 너무 힘들었는지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들에게 지금 그만 두면 다시는 버스가 안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여러분 뿐 아니라 여러분의 아이들도 공부를 할 수 없으니까 한 달 만 견디자면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 가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 달이 지나도 꾸준히 승객이 있자 버스 회사는 약속대로 정식으로 노선을 개설하였고 버스는 점점 빨라져서 12시에 집에 도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3년, 4년이 지나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을 모두 마쳤고 그 중에서는 대학까지 졸업을 하였다.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에는 학비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거리를 주었는데 마침 우리가 유치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 청년들은 유치원에서 보조 교사로 일 하게 하고 남자 청년들은 건축이나 풀 베는 일을 시키고 월급을 주어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하더니만 청년들이 직장 생활을 하며 십일조도 열심히 내고 선교헌금도 내면서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결혼을 한 사람도 생겼다.)한 달에 한 번씩 지역 전도를 나가고 주일학교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봉사하며 제직회도 한 달에 한 번씩 하면서 교회 전반적인 일들을 서로 의논하며 자립하는 교회로 만들어 갔다. 이제는 동네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7명 있는데 그 7명이 모두 우리 교회 교인들이다. 그리고 대학을 가려고 준비 하고 있는 청소년들도 많이 있다.
일단 공부를 하고 나니까 우리들과 대화가 통하고 가르치기도 수월할 뿐 아니라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십일조를 내는 교인이 늘다 보니 교회 재정의 여유가 생기고 우리의 경제적 도움이 없이도 교회가 운영되기 시작했고 또한 리더자들이 지식수준이 높다 보니 교회도 잘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드디어 만 10년 만에 교회를 이들에게 이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베이자 프로르 교회는 14살이 되었다. 어린아이 시기를 벗어나 청소년기로 들어가는 교회로서 부모인 우리에게 근심 대신 기쁨을 선사하고 받는 것에서 베푸는 쪽으로 변화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씩 방문해 보면 그 때마다 마음이 무척 뿌듯하다. 교회를 예쁘게 색칠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자기들의 교회를 잘 돌보며 또한 각 자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영적인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동안 힘들었던 것들이 다 잊혀진다.
짝사랑이 상호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 남편 선교사의 머리카락 빠지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이제 그나마 남은 머리카락을 잘 지킬 수만 있다면 당분간은 남들에게 60살 이상으로는 안 보일 것이다. (휴! 다행)
두 번째 교회는 겨우 4살이 되었다. 아직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이다. 하지만 한 번 경험을 해서인지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넘어지면 곧 일어나겠지, 조금 기다리면 괜찮아 질 거야 하면서 지내고 있다. 성장하는 속도는 첫 ㄹ번째 교회보다 빠른 것 같다. 원래 둘째가 더 빨리 배우고 눈치도 많아서 재능 꾼이 많다 더니 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교인들이 쑥쑥 커가고 있다. 사랑을 듬뿍 먹어서인가?
요즘은 남편의 머리카락 빠지는 속도가 멈춘 것 같다. 사랑을 받아서인지 머리카락이 더 이상 빠지지 않는다. 사랑의 파워는 참으로 큰 것 같다. 머리카락의 운명까지 좌지우지 하니 말이다.
이제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도 하고 가끔씩 사랑 싸움도 하면서 알콩 달콩 잘 지내고 있다. 사랑을 하면 곰보도 보조개로 보인다고 하던데 브라질 사람들이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기만 하다. 남편이 브라질 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 샘도 냈었는데 그 사랑에 나도 감염되었는지 이젠 나도 이들이 너무 너무 예뻐보인다. 역시 사랑은 전염성이 강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랑의 위대한 힘으로 남편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사랑 따봉! (Ta bom, 브라질 말로 아주 좋다는 뜻)
***참조
이글은 책으로 편집되어 출판됩니다. 이 글은 원작 원본입니다. 수정 없이 쓴 원본입니다. 책으로 출판될 때에는 제목과 내용이 약간 수정된다고 합니다. 이번 글은 선교사님들의 선교현장이야기 묶음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저희가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축하 해주세요!!! 상금도 받는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