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5월 정기모임 때 전했던 말씀을 다시 올려드립니다…

[설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본문: 욥기 23:8-14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금은 부와 명성을 상징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귀금속입니다. 돈과 재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쳤다’는 말처럼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합니다. 또한 금은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기 중이나 물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화학적으로 가장 안정된 금속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쓰이며, 고대 이집트에서 영원한 삶을 희구하는 의미로 왕의 무덤에 사용했을 정도로 금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을 생산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 비용이 듭니다. 동광석에서 24K의 순금을 얻기까지 3개의 용광로를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3000도 이상의 뜨거운 불에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순금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동광석 50t을 제련하면 1㎏바의 금괴가 나오는데, 이렇게 고온에서 장시간 제련하면 마지막 불순물이 제거되고 금의 표면이 장력을 일으켜 판판하게 퍼집니다. 그때 금의 표면 위에 제련사의 얼굴이 거울보다 더 또렷하게 비친다고 합니다. 마침내 순금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인공인 ‘욥’이란 인물이 바로 이런 ‘정금’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갑자기 닥친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시련에 온갖 고난을 다 당하지만 이러한 극한의 고통을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창조 섭리를 온몸으로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욥은 ‘우스’지방의 족장으로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의롭고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아침마다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릴 정도로 신실한 믿음을 소유했던 그는 사단의 시기를 받아, 하나님에 대한 충심을 시험받는다는 명목 하에 큰 재앙을 당해 재산을 다 날리는 것은 물론 열이나 되는 자식을 모두 잃는 아픔을 당했고 자신은 희귀한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긁어야 하는 등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르는 극한의 고난을 겪어야 했고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지만, 욥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신 이도 하나님이고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니 그분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토록 의연하고 강인한 믿음의 욥이었지만,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슬픔과 절망을 가눌 길이 없어 욥기 3장부터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토로하게 됩니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의 섭리를 부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탄식과 항변은 그 후 친구들과의 대화를 거치면서 강도가 더 높아져 갑니다.

그러면 1장과 2장에서의 욥의 모습과 3장 이후의 모습이 왜 이리 다를까요? 현재 그는 재산, 가족, 건강을 잃은 차원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본들이 담겨있는 인생의 바운더리가 철저히 무너져가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즉 자신의 존재 기반이었던 삶의 울타리를 상실해가고 있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3장 마지막 구절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라는 절망어린 탄식이 욥의 현재 상태를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한편으로는 수긍하고 순종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부정하고 저항하는 욥의 모습에서 유한한 존재로서 실존적 한계에 도달했을 때의 우리 인간의 자화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4장부터 37장까지 진행되는 욥과 친구들 사이의 토론은 장황하고 지루해보이지만 그 긴 과정을 통해 욥의 사상이 발전하고 그의 내면적 자아가 성숙해짐을 봅니다.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자신들이 지혜의 교사인양 고통당하는 욥을 향해 ‘네가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게 있으니까 이렇게 벌을 받는거다’라고 정죄하며 그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러한 친구들의 비판적인 태도는 당시의 전통적인 신앙 상식에서 볼 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구약시대의 세계관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 복을 받고 거역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상선벌악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친구들의 이와 같은 전통적 도덕관념에 얽매인 인식의 한계를 거부합니다. 그는 고통이란 하나님의 징벌도 아니고 죄의 분량대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항변하며 자신의 이유 없는 고난을 맹목적인 운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이해하며 고난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자 몸부림칩니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계속하지만, 단순히 고통의 탄식에서 벗어나 슬픔과 자기 연민의 언어가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에 대한 소망의 언어로 차차 바뀌어 갑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인과응보 법칙과 같은 인간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없는 크고 광대하며 자유로운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 속에 23장 10절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같은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 중에 고통당하고 있지만,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왼편을 가도 오른편을 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지만, 나의 결백을 그분이 모두 알고 계시며 이 고난의 시간들을 굳건하게 견디고나면 다시 나를 귀하게 세우실 것이라는 용기와 확신에 찬 위대한 선언입니다. 여기서 “나의 가는 길”이란 말은 ‘길’이란 뜻의 히브리어 명사 ‘derek'에 ’함께‘라는 1인칭단수 전치사 ’imadi‘가 붙은 ’나와 함께 하는 길‘로서, 의역하면 ’나의 인생‘ 내지 ’나의 운명‘이란 의미가 됩니다. 또 ‘알다’라는 히브리 동사 ‘yada'도 그저 적당히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속속들이 궤뚫고 있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욥은 그의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를 3000도 이상의 뜨거운 불에 담금질하며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것이고 이 고통스런 연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반짝이는 순금과 같이 더욱 고귀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라 통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신앙고백은 뒤에 이어지는 13-14절 말씀으로 더욱 확증됩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실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전폭적인 수용이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최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뜻을 전적으로 포기한 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에 맡긴 초탈의 경지에 오른 상태입니다. 이런 수준에 이르면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합치되고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욥의 주를 향한 간절한 마음과 부르짖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38-41장에 기록된 ‘폭풍우 언설’에서 하나님은 왜 욥이 이처럼 무고하게 고통을 당해야했는지, 그 고통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답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와 같은 수없이 반복되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이 세계가 얼마나 크고 광대하며, 반면에 그 창조세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고 그들이 갖고있던 지혜가 또 얼마나 미천했던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또 이와 같은 깨달음을 통해 욥이 기존의 인과응보적인 신앙관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인간의 상식과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것에 전능하고 자유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섭리를 발견한 욥은 42:2-3에서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관습화된 신앙의 경건성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지혜를 경험한 깊이있는 영성의 세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 마지막 부분에서 욥은 고난당하기 전보다 2배의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축복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내면적 성숙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즉 아픈만큼 성숙해졌다는 것입니다.

욥이 받았던 고통에는 못 미치겠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수 많은 문제와 시련이 있습니다. 또 욥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신 데에는 하나님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즉 각자에게 닥친 고난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해져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일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일상적인 삶의 한계를 뛰어넘어 당신이 창조하신 광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신비를 만끽하며 모든 피조만물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는 구원사역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즉 나와 내 가족, 내 교회 중심의 개인적인 구원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을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당시의 온전한 질서로 회복시켜 놓는 것을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 한인들을 이 미국 땅까지 오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자 이민 온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야할 목적은 모두 같습니다. 바로 우리의 장애와 운명, 모든 형편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땅을 새롭게 회복시켜 하나님께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합니다.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인간의 그릇된 욕심과 정욕으로 나날이 타락해가는 이 땅의 백성들을 회개케하여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인종간의 갈등과 차별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로해야하는 사명이 우리 한국 이민자들에게 있습니다. 정말 시대의 등불로서 어두워져가는 이 세상을 환히 밝히며 화해와 용서와 평화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우리 한인들을 이 땅 위에 부르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부디 욥과 같은 순전하고도 강인한 믿음으로 모든 시련과 연단을 훌륭히 극복하고 반짝이는 정금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세계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그분의 구원 사역을 함께 펼쳐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준수 목사 드림